탐방을 시작하며

[경주 남산] 홈으로 돌아가기

이제 남산 탐방을 시작합니다.. diagram-arrow-down

이제 경주 남산 관련 탐방로 소개 및 그에 관련된 간략한 갤러리는 이곳에 다 모았습니다만, 향후로도 약간씩의 수정 및 보완은 지속적으로 이어집니다..


남산사진 갤러리는 남산의 모든 길을 (한 3개월 정도)다시 한번 거닐어 보면서 천천히 만들어가려고 하는데, 대략 지나면 완성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또 고행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ㅡㅡ;


남산, 간략소개

여기서는 본격적인 남산 탐방을 시작하기 전에 꼭 필요한 준비물들을 미리 챙기고, 탐방을 위한 사전 지식을 갖추어 두기로 합니다..

남산 탐방로 간략소개
남산의 유물과 유적지는 많은 부분 서남산 쪽에 몰려 있는데, 삼릉계곡으로 올라 [금오봉]을 거쳐 용장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문화유적 답사 코스이며, 남간사지포석정, 삼불사 등산로, 약수계곡비파곡, 천룡사지 등의 답사 코스가 있습니다
동남산 방면에서는 불곡, 옥룡암보리사 주변을 아우르는 문화유적 답사지, 국사곡지암곡지바위골, 남산부석 답사 코스, 염불사지에서 칠불암(및 신선암)으로 오르는 길 등이 가장 대표적인 문화유적 답사 코스입니다
남산의 최남단인 새갓골 방면에서는 여전히 눕혀져 있는 마애대불을 거쳐 똑바로 봉화대 능선까지 올라가는 기본 답사 코스와 함께, 그 전에 옆으로 빠져 들어가면; 열암곡양조암골침식곡 등을 사방으로 아우르는 문화유적 답사 코스가 있습니다

* cf 1) 남산의 최북단인 [도당터널] 옆 올렛길 방면에서는 [해목령 등산로]를 걸어 [서남산 순환도로] 삼거리와 만나고, 여기서는 서남산 방면의 포석정(및 동남산 방면의 옥룡암)으로 내려가거나, 또는 [금오봉]으로 오를 수도 있습니다

* cf 2) 용장계곡에서 오르는 [이무기 능선][쌍봉 능선], [이영재][열반재], [틈수골]이나 [새갓골]에서 오르는 [천룡재], [새갓골]이나 [칠불암]에서 오르는 문화유적 탐방로와 [봉화대 능선], [백운재] 등은 모두 [고위봉]으로 연결됩니다


남산 등반을 시작하실 때, 남산의 각 [공원지킴터]에 에서 제공하는 공식 탐방로 종이지도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꼭 챙겨가시고.. 등반 시에는 종이지도가 편하긴 한데, 혹시라도 못 챙기고 오르신 경우, 급한대로 이 라도 보십시오

또한, [서남산 주차장]과 [통일전 주차장]에 위치한 에서도 남산 종이지도와 함께, 각 탐방로별 탐방 안내지도(뒷면에는 각 유물, 유적지에 관한 충실한 설명들도 있어 매우 유용합니다)가 비치되어 있으니 꼭 챙겨서 오르시길 권합니다 - 말만 잘하면; 충실한 해설과 함께 꽤 두터운 책자인 도 얻으실 수 있습니다 ^^


참고로, 남산의 탐방(및 등산)로 그림지도는 남산의 길을 개략적으로 알아보고자 할 때는 [경주 국립공원공단] 지도가 살펴보기 좋고, 아주 세밀히 탐방길을 찾아가야만 하는 경우에는 [경주남산연구소] 지도가 유용합니다 - 결론적으로, 두 지도 모두 챙겨서 출발하시면 금상첨화입니다 ^^

남산, 둘러보는 길

경주 은 신라 초기부터의 궁궐이었다는 ( 사이에 반달 모양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야산 언덕)의 남쪽에 있는 산 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북쪽의 금오산과 남쪽의 고위산 두 봉우리 사이를 잇는 산들과 계곡들을 통칭하는데.. 산을 돌아가는 도로를 기준으로 크게 [서남산] 지역과 [동남산] 지역으로 나뉩니다

서남산 둘레길
은 남산의 북쪽 시작 지점인 ([도당터널] 옆)올렛길 등산로 입구에서 식혜골 을 거쳐, 혹은 ([오릉] 인근)나정에서 출발하여 [남간사지]로 들른 뒤, (마을 길이나 농로, 도로를 통해)포석정삼릉, 용장 등을 지나치면서 남산의 남쪽 끝자락인 새갓골까지 돌아가는, 서남산 주변을 아우르며 지나가는 길입니다

* cf) [도당터널] 위 [작은 식물원]에는 예쁜 꽃들을 감상할 수 있는 휴식터가 있고, 계속 올라가면(경주시내 방향) 신라시대 최고위 귀족들이 모여 국가대사를 논의한 가 열리던 화백정을 지나서 로 내려가는 가 있는데..

[화백정]에서 앞을 바라보면; 옛 신라의 궁궐터였던 월성 숲이 길게 펼쳐져 있고, 그 앞으로는 중 하나인 남천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남천의 모래는 너무 고와 물을 거슬러 위로 올라간다고(혹은, 물이 너무 맑아 그렇게 보인다고도) 합니다만, 실제로 그런지는 직접 찾아가서 확인해 보십시오 ^^

기왕지사, [도당터널]을 건너갔다면; 경주를 방문하는 모든 분들이 반드시 찾으시는 도 다 들러 보십시오.. (* 여기서는, [첨성대]만 보여드리니, 다른 곳들은 직접 월성을 찾아가서 거닐어보시기를 권합니다 ㅡㅡ;)


여기서 잠시, [도당터널]을 건너 [화백정]으로 가서 [월성 숲]과 [남천], [월정교]와 [교촌마을]을 조망해보기로 합니다

화백정
화백정
화백정
화백정
화백정
화백정
화백정
화백정
화백정
동남산 둘레길
은 최치원이 상서장에서 지내며 공부하던 [고운대] 바위 바로 옆으로 내려가는 좁은 길에서부터 시작하여 옥룡암보리사, 천년숲 정원, 통일전서출지를 거쳐 염불사지에서 끝나는(여기서부터는 칠불암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시작됨), 동남산 주변 전체를 아우르며 지나가는 길입니다

* cf) 신라의 대문필가였던 선생이 공부하던 [고운대]와 [상서장]도 한번 들러서 잠시 상서장의 정취에 취해보시고..

우측 옆 좁은 샛길에서부터 시작하는 를 잠시 걸어오르면; ([도당터널] 옆)올렛길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게 되고, [해목령 등산로]를 거쳐 [서남산 순환도로]와 만나게 되는데, 이제 순환도로를 걸어 금오봉으로 오르거나, 혹은 포석정 방면으로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상서장]의 정취

상서장
상서장
상서장
상서장
상서장
상서장
남산 순환도로
는 말이 필요없는, 가장 확실한 남산 등반길의 이정표입니다. 이 임도는 남산을 동서로 관통하는데, 서남산의 [포석정 공원지킴터]에서 시작하여 중도에 [해목령 등산로]에서 과 만나고, 금오봉까지 올라갑니다. 이제부터는 동남산 방면으로 내려가는데, 중도에 [봉화대 능선]으로 과 만나고, 동남산의 [남산동 공원지킴터]에서 긴 여정이 끝나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만 걸으면 서출지통일전, 혹은 [염불사지] 방면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남산의 북쪽 끝인 [도당터널] 옆 올렛길 입구(또는, [상서장] 옆 등산로)에서 등반을 시작하면; [해목령 등산로]를 걸어 [포석정 공원지킴터]에서 올라오는 [서남산 순환도로]와 만나게 됩니다. 이제 순환도로를 걸어 금오봉으로 오르거나, 혹은 포석정 방면으로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남산의 남쪽 끝인 [새갓골 공원지킴터]에서 시작하면; [열암곡]으로 걸어 [봉화대 능선]에 올라타게 되고, 길게 걸어 동남산 방면에서 올라오는 [동남산 순환도로]와 만나게 됩니다. 이제 순환도로를 걸어 금오봉으로 오르거나, 혹은 동남산의 서출지, 통일전 방면으로 내려갈 수도 있습니다

목없는 부처님들

남산에는, 많은 '목없는 부처님'들이 살고 계시는데, 왜 목이 없는지? 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매우 불가사의한 주제입니다

박물관에 갇히신 부처님들
남산 탐방로를 오르내리다, 수시로 목없는 부처님들을 보면서 '왜 부처님의 목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 한번쯤은 드셨을 터인데.. 그 정답은 아직 없습니다. 어쨌건 목없는 부처님들 은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주제이긴 합니다
하지만, 비운의 부처님들만 계시는건 아닙니다. 이 석등 또한 부처님의 상징입니다 - 그래서 부처님의 호위 역사들이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 이제 에 계시는 다른 부처님들 도 잠시 초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 초청하지 않은 의외의 부처님도 깜짝 까메오로 출현하시니 너무 놀라지는 마십시오 ^^
신라 시절 경주 지역에는 거대한 부처님과 쬐끄만 부처님, 아름다운 부처님과 못생긴 부처님, 아줌마 부처님과 처녀 부처님, 할배 부처님과 할매 부처님, 아기 부처님에다 부처님의 수행자와 수호자, UFO 부처님(?)까지.. 수많은 부처님들 이 민초들의 삶과 애환이 있는 모든 구석 구석에서 함께 숨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만..
부처님 주변에는 언제나 곁을 따르는 수행자들, 각자의 일을 하는 또 따른 부처님들, 부처님을 지키는 장군들과 호위무사들에다 기괴한 형상을 한 고대의 짐승들(?)도 있었습니다. 좀 무시무시한 감은 있지만, 그래도 부처님의 친구들 도 한번 만나보시길 권합니다 - 머, 약간은 무서울겁니다 ^^ 참고로, 부처님 주변의 사방 사면 부처님들을 좀 더 살펴보시려면; 신라 천년 불교미술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을 만나보시기를 권합니다

경주에 오시면 은 꼭 들러보시기를 권합니다만, 급한대로 신라미술관 의 영상으로 대신하십시오.. (그외에도, 다수의 영상관이 있으니 스스로 찾아서 살펴보십시오 ㅡㅡ;)

한편, 부처님 중에는 아주 특이한 분도 계십니다. 바로, 부처님의 '자비'를 행하는 중 11개의 얼굴을 가진 이십니다. 이 부처님은 다양한 표정으로 선한 중생(정면의 3얼굴), 악한 중생(좌측 3얼굴), 덕을 쌓아가는 중생(우측 3얼굴)을 모두 구제하고자 하는 가장 자비로운 보살이십니다. 또한, 뒷면 얼굴로는 선악을 궤뚫어보면서 악한 이들을 옳은 길로 인도해주고, 정면 얼굴로는 깨우침에 다가선 이들에게 불도의 오묘한 진리를 알려줍니다 - 간혹은, 다양한 방법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팔 또한 여러 개를 더 보태 휘두르기도 하십니다 ^^
석굴암 관음보살님들 도 그렇고.. 다들 멋진 부처님들이긴 하지만, 저는 이 거만하게(?) 앉아계시는(얼굴 표정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다리 꼬고 앉은 모습이), 좀 도도해 보이기도 하는 부처님을 가장 좋아합니다. 비록, 양팔과 머리를 잃은 애처로운 부처님이시지만.. 그 유명한 로댕의 조각상보다 훤씬 더 고고하고 심오한, 어쩌면 좀 거만해 보이기도 하는(?)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신라 시절 최상위급 귀족들의 개인 소장품이었을 금동불 부처님들 또한 그 예술미 자체로는 걸작이긴 합니다만.. 당시 민초들의 삶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생로병사와 애환, 번뇌를 함께 나누면서, 그러한 민초들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 '고뇌'하셨을, 그리하여 팔다리에 머리까지 잃으신, 저 흔하디 흔한 돌로 거칠게(?) 다듬어진 석조 반가사유상 부처님이 저에게는 훨씬 더 정겹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 '사색'하는 금동 반가사유상 부처님 또한 깊은 경외감과 함께, 하나의 의문도 불러옵니다

여기서 잠시, 에 들러 '사유'하는 반가사유상 부처님을 한번 만나뵙기로 합니다 - 이 부처님의 '사유'에는 어떤 '고뇌'가 담겨 있는지?

사유반가상
사유반가상
사유반가상
사유반가상

옛 우물터, 석정

여기서 별안간 '우물' 이야기가 끼어드니, 약간은 시답잖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란 간단한 단어에도 우리 조상들의 삶과 애환, 바램 그리고 과학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물터 이야기
우리 조상들의 삶과 단 한시도 떨어질 수 없었던, 매일같이 사용하던 그 우물터 - 매일같이 아침, 저녁으로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수다도 떨고, 떠도는 소문도 전달하고, 정담과 고민도 함께 나누던 곳. 그래서 '우물터'입니다. 마을의 '빨래터' 역시 비슷한 역할을 했겠지요?
는 조선의 천재 풍속화가로서, 당시 우리 서민들의 삶과 생활상을 해학적으로 간결히 묘사해낸 여러 풍속도를 남겼는데.. 그 중 한 폭인 이 '우물가' 풍경은 우물터에 얽힌 우리 조상들 삶의 한 가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웃통을 다 드러낸 채 두레박 채로 벌컥벌컥 물을 마셔대는 남정네 앞에서, 우물가 젊은 새댁들은 살~짝 고개를 돌리거나 숙이고서 못본체 하고 있군요 ^^ 뒤에서 “ㅉㅉ” 하며 혀를 차는 듯한 나이든 아낙네 표정도 재밌습니다 ^^

'샘' 또한 '우물'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지만, 어감은 약간 다릅니다. '샘'은 보통 땅 밑에서 자연스레 솟아나는 경우를 이르며(예컨대, ‘솟구쳐 오르는 옹달샘’), '우물'은 많은 사람들이 항시적으로 쓸 수 있도록 그 샘이 솟아오르는 곳을 파고 돌 등으로 사방을 막아 고이도록 한 곳을 이르는데.. 井우물 정 한자가 바로 그 모양을 본뜬 것입니다(반대인가?)


여기서 잠시, 당시 우리 서민들의 삶과 생활상을 해학과 함께 간결한 스케치로 담아낸,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던"(단원의 후원자 겸 벗이었던 강세황의 평) 천재화가의 를 감상하는 시간을 한번 가져보십시오 - 옆 그림에서는 몰래 숨어서 여인네들의 빨래터를 훔쳐보고 있는 '고상한'(?) 취미를 지닌 선비 양반이 보이는군요 ^^

기왕지사, 단원과 동시대를 살았던 또 다른 천재화가 도 한번 감상해보고 넘어가기로 합니다. 신윤복은 김홍도와는 좀 다르게, 서민들의 삶을 다룬 풍속화만 아니라 산수화와 미인도 및 '고상한'(?) 양반 세계를 풍자한 세련된 그림들을 많이 그렸습니다만, 그 또한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습니다 - 옆의 단오날 풍경을 그린 그림에서도 역시 몰래 숨어서 기녀들의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못된'(?) 아이들을 숨겨 놓았군요 ^^


반상班常 구분이 엄격하던 조선시대의 유교 체제에서 유일한 르네상스기였던 영정조 때에, 일반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붓 하나로 해학적으로 간결히 묘사해낸 김홍도나 그 고리타분하던 체제의 갑갑함에서 벗어나려는 여인네들의 애달픈 욕망을 섬세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선비 양반네들의 숨겨진 가식을 세련되게 풍자해낸 신윤복의 그림들을 살펴보았지만..

사실, 그 당시에 양반네 밑에는 일반 '상놈'보다도 더 밑에서 살아가는 조선 광대 등의 '천민'(요즘의 가수, 배우, 무용가, 스포츠 스타 등 ㅡㅡ;)에다 '불가촉不可觸 천민'(소, 돼지 잡는 백정 등)도 있었습니다. 머, 그건 그렇고, 여기서 조선 광대의 판소리 한 편 듣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합니다..

경주의 석정들
우리 조상들의 삶과 단 한시도 떨어질 수 없었던, 매일같이 사용하던 그 우물터, 곧 경주의 석정들로는; 김유신 장군의 이야기와 얽혀있는, (당시의 최고위층 집안의 우물이었을)재매정 석정, [김호장군 고택] 안에 있는 양반댁 석정, (아마도, 일반 마을 사람들, 혹은 절간에서 쓰던 공동 우물터였을)[남간사지] 석정 등이 남아 있습니다

신라 궁궐에서 사용하던 옛 우물터 위치([왕정골] 맨 위 지점, 현재의 도당터널 아래 땅 밑)가 현재의 [도당터널] 밑이라고 하는데.. [도당터널] 공사에 의해 너무 깊이 묻혀버려 이제는 도저히 찾아낼 도리가 없을 듯합니다 ㅡㅡ;


경주의 석정들 들러보기

석정
석정
석정
석정
석정
분황사 석정 이야기
[분황사]에는 삼국통일 이후 당나라의 침략을 대하는 신라인들의 저항 심리가 담긴 '기묘한 이야기'(『삼국유사』)로 전해지는 이 있는데.. 여기에는 이 석정 안에 살고 있는 3마리의 호국용 이야기, 조선시대 때 분황사 내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 안에 넣었다는 '아픈 이야기' 등의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 호국용 이야기

『삼국유사』에 이 우물에 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동천사(東泉寺)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 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용이 살았다.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 사신이 주술을 써서 이 용들을 물고기로 둔갑시켜 잡아갔다. 이 용들의 부인이라는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남편을 찾아줄 것을 청하였다.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자, 물이 한 길이나 솟아오르고 용들이 기뻐하며 날뛰었다

.. 그러나 이 우물에는 조선 시대에 분황사에 있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곳에 넣었다는 아픈 이야기 또한 전해진다

- [분황사석정 안내판] ( )

분황사와 황룡사지

[분황사 석정]을 찾아본 김에, 그외에도 많은 '기묘한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오는 중 하나라는 이 자리했던 도 겸사겸사 한번 돌아보기로 합니다

분황사 둘러보기
[분황사]에는 그 거대하게 자리잡은 과 함께, 신라의 대미술가 가 [황룡사]에 그렸다는 (새들이 나무로 알고 날아와 벽에 부딪쳐 죽었다는, 바로 그)벽화(의 모사?), 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는 원효대사비 받침돌 등의 다양한 유물들과 '기이한' 이야기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솔거는 일찍이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老松圖), 몸체와 줄기는 비늘처럼 주름지고, 가지와 잎이 구불구불하게 얽혔다. 까마귀·솔개·제비·참새가 때때로 그것을 보고 날아들었다가, 와서는 비틀거리다 떨어지곤 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색이 바래지자, 절의 승려가 단청으로 그것을 보수하였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다시 오지 않았다. 또 경주 분황사 관음보살과 진주 단속사 유마상은 모두 그의 필적이다. 대대로 전해지며 신묘한 작품으로 여겨졌다

-『삼국사기』 ( )

경덕왕때 한기리에 사는 여인 희명의 아이가 태어난 지 5년이 지나자 문득 눈이 멀었다. 하루는 그 어미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전 북쪽 벽에 그린 천수대비(千手大悲) 앞에 나아가서 아이로 하여금 노래를 불러 빌게 하니 마침내 눈이 밝아졌다

-『삼국유사』, 분황사천수대비 맹아득안 ( )

또한, 딴 곳의 그 흔한 당간지주들과는 달리, 많이 특이한 형태의 도 장대하게 펼쳐진 [황룡사지] 앞에 떡하니 자리잡고 서 있습니다

분황사 둘러보기

분황사
분황사
분황사
분황사
분황사
분황사
분황사
분황사
분황사
분황사
황룡사지 돌아보기
이제 [분황사] 앞에 장대하게 펼쳐져 있는 [황룡사지]도 한번 거닐어보기로 합니다. 다만, 이 은 워낙 넓은 곳이라서(황룡사지 터에 축구장을 만든다면; 한 10개는 만들 수 있을듯 ㅡㅡ;) 다리품 좀 팔아야 합니다 ㅡㅡ;
아직도 발굴작업이 진행중이라 직접 볼만한 탑이나 부처님 등은 만나볼 수 없지만, 호국 신라를 상징하는 신라의 3대 보물이라던 그 거대했던 9층목탑 자리의 초석들과 장륙상이 놓여졌던 석조대좌 등은 찾아볼 수 있습니다 - 각각 모두 엄청하게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해동의 명현(名賢) 안홍(安弘)이 편찬한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라 제27대에 여왕이 왕이 되니 도(道)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九韓)이 침략하였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곧 이웃나라의 침입이 진압될 수 있다.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 제4층은 탁라, 제5층은 응유, 제6층은 말갈, 제7층은 거란, 제8층은 여적, 제9층은 예맥이다”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 ( )


황룡사지 둘러보기

황룡사지
황룡사지
황룡사지
황룡사지
황룡사지
황룡사지

낭산을 바라보며

옆 버스승강장(다리 옆)이 있는 곳에서 [남천] 건너편을 바라보면; 신라 시절 신령스런 산으로 여겨오던 이 눈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 아주 낮고, 쬐~끄매서 평범한 야산으로 보이지만.. 그리 시시한 곳이 아닙니다 ^^

경주 낭산일원
천년숲 정원 이 시작되는 지점 삼거리 도로(다리, 버스정류장)에서 남산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면; 바로 코 앞으로 가 위치한 작은 솔숲이 있고, 그 너머 도로 건너편으로 가 보입니다 - 바로 뒤 길게 펼쳐진 낮은 야산은 늑대와 신선들이 살았다는, 『동국여지승람』에서 ‘서라벌의 진산’이라고 한 입니다
[낭산]은 신라 왕실의 초창기부터 ‘신령들의 산’이라고 부르며 신성시해 왔던만큼(『삼국사기』), 그 일원은 작은 남산이라고 불러도 될만치 많은 유물, 유적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 도리천 과 (그 밑에서 도리천을 지키고 있는) , (문무왕의 화장터인) , , , [경주국립박물관]으로 옮겨진 [십일면 관음보살상] 등등..
삼국통일 당시 당나라의 침공을 물리친 문무대왕이 당나라의 또 다른 침략을 막으려는 기원으로 [사천왕사]를 지었다는 말에 당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살피러 온다고 해서 [사천왕사]로 속이기 위해 [망덕사]를 지었다는 도『삼국사기』및『삼국유사』에 전해집니다만.. 머, 트럼프란 힘만 쎈 거지넘이 맨날 돈 내놓으라고 우리 대한민국을 압박해대는 지금도 그렇듯이, 그때나 지금이나,, 약소국의 비애입니다 ㅡㅡ;

낭산 둘러보기

낭산
낭산
낭산
낭산
낭산
낭산
➥ 선덕여왕의 '도리천'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데, 하지만 도리천은 하늘 위에 있는 부처님의 산인 수미산의 맨 꼭대기에서 부처님 세상을 호위하는 곳인데(?)

제27대 덕만(德曼)의 시호는 선덕여왕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나라 다스리기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 있었다

1. 당태종이 홍색·자색·백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다. 왕이 그림의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 하며 이에 씨를 정원에 심도록 명하였다. 꽃이 피었다가 떨어질 때까지 과연 왕의 말과 같았다
- 당시에 여러 신하가 왕에게 어떻게 그렇게 될 줄을 알았는가 물었다. 왕이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바로 당제(唐帝)가 나의 짝이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2.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임에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이나 울었다..
(* 이 이야기 관련 여왕의 답변은 18금이라서 생략함 - 직접 [삼국유사]에서 찾아보세요 ^^)

3. 왕이 아무런 병도 없는데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짐은 모년 모 월일에 죽을 것인즉, 나를 도리천(忉利天)에 장사 지내도록 하여라” 하였다. 군신들이 그 곳의 위치를 몰라 “어느 곳입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낭산(狼山) 남쪽이다” 하였다. 모 월일에 이르러 과연 왕이 승하하시므로 신하들이 낭산의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냈다
-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이 사천왕사를 왕의 무덤 아래에 창건했다. 불경에 이르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그제사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삼국유사』, 선덕여왕 知幾三事 (* 내용 편집) ( )


현재 [선덕왕릉]이 있는 [낭산] 정상이 바로 신라 시대의 '도리천'이었고, [사천왕사]의 은 그 '도리천'을 지키는 호국신이었습니다. 한편, [망덕사]는 당나라로부터 [사천왕사]로 속이기 위해 지은 절이었는데, 여기에는 죽은 뒤 다시 살아돌아온 ‘망덕사 선율스님 이야기’, ‘불무사와 진신석가 이야기’ 등의 여러 전설이 전해집니다..

문무대왕의 염원
낭산의 정수리에 자리잡은 [선덕여왕릉],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의 화장터인 [능지탑], 문무왕이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또 선덕여왕의 '도리천'을 지키기 위해 지은 [사천왕사], 당나라로부터 [사천왕사]를 숨기기 위해 지은 [망덕사] 등.. 모두 삼국통일 전후 신라 지배층의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호국 일념이 깃들어 있는 유서깊은 곳들입니다 - 단지, 이전부터 신라 왕실에서 신성시해왔기에 ‘신령스런 산’만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삼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한 선덕여왕의 꿈 과 삼국통일을 완수하고 이어지는 당나라의 침공에 맞서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자 했던 문무대왕의 염원 이 깃들어 있습니다.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며, 자신이 죽으면 간소하게 화장하여 동해 바다에 뿌려주면 거기서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는 유언을 남겨 감포 앞 [대왕암]에 안장되었는데, 바로 입니다 - 그 이후로 문무왕은 호국용이 되어, 지금까지 동해 바다에서 왜구의 침입을 지켜보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만에 붕어하니, 유조를 따라 동해 중의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왕이 평소에 항상 지의법사에게 이르기를 “짐은 죽은 뒤에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고자 한다” 하였다. 법사가 말하기를, “용이란 축생보(畜生報)가 되는데 어찌합니까?” 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랜 지라, 만약 나쁜 응보를 받아 축생이 된다면 짐의 뜻에 합당하다” 하였다

-『삼국유사』, 문무왕의 죽음 ( )

문무왕의 아들인 은 태종무열왕과 문무대왕이 이룩한 삼국통일 이후, 통일 신라의 기틀을 공고히 다졌는데, 문무대왕을 [대왕암]에 장사지낸 뒤 를 세우면서 용이 된 아버지가 이곳을 드나들 수 있도록 감포 앞바다로 나가는 지하 수로도 뚫어뒀다고 합니다('감은사'는 대왕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대체 왜? 어떻게?? 당시 삼국 중 한반도의 가장 외곽에 위치한, 척박한 땅에서 시작하여 국력도 가장 약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원동력이 바로 이 낭산에 남은 유물 유적지들에서 보여지는,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당시 지배층의 호국 일념이었던 듯합니다 - 신라의 호국을 상징하는 [황룡사 9층목탑]과 [황룡사 장륙상], ‘호국용 이야기’로 전해지는 [분황사 석정] 또한 그 호국의 일념에서 나온 국가 수호의 의지를 드러낸 상징물들이었습니다!

삼국 중 가장 약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데에는, 많은 이전의 공헌자들이 있었습니다. 선덕여왕 이후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 된 태종무열왕 (와 그 동생 김인문), 그리고 흥무대왕 장군을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김춘추의 무덤인 , 삼국통일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김인문의 넋을 기린 , 등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저 주역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도 한번 찾아가보십시오

윤가네 亡山 이야기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 는 옛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그와는 반대로, 미꾸라지가 어쩌다가 山에 올라 지 분수도 모른 채 龍으로 승천한 것으로 착각하여 王이라도 된듯이 맨날 밤 주구장창 술에 쩔은 채 매관매직만 일삼다 亡한 자도 있다고 합니다

산신이 나타나 춤을 추다
시절은 표면적으로는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최정점에 선 태평성대 시기였다고 하는데, 이 헌강왕은 용왕을 만나 그 아들인 '처용'을 궁으로 불러들이고( 와 처용가, 처용탈 이야기), [포석정] 방문 시에는 남산의 신인 '상심'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어보였다고도 합니다 - 이른바, 요즘 무속인들의 인데.. 옆에 있던 신하들은 아무도 '상심'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왕이 직접 그 춤을 신하들 앞에서 시연해서 보여주었다고 전해집니다

제49대 헌강대왕 때는 경사(京師)에서 해내(海內)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장이 연이어져 있었으며,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 풍악과 노래 소리가 길에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철마다 순조로웠다

-『삼국유사』, 처용랑 망해사 ( )

그 외에도 '북악신', '지신' 등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얘기들도 이어집니다. 이처럼 헌강왕에 얽힌 신라의 '태평성대' 시절 이야기들은 이구동성으로 전해지지만.. 이에 대해 당시의 어떤 책(『어법집(語法集)』-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습니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산신이 나타나 춤을 추고 노래를 한 것은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임을 암시한 것인데, 나라 사람들은 이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상서(祥瑞)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여 향락에만 너무 심하게 빠졌기에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다

-『삼국유사』, 산신들이 나타나 춤을 추다 ( )

실제로, 신라의 최전성기였다는 [헌강왕] 이후.. 모든 부와 권력을 독점한 채, 자신들만의 달콤한 향락을 누리고 있던 당시의 진골 지배층에 대한 하층민들의 반란이 본격화되고, 이후 통일신라는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헌강왕 시절의 그 번영의 정점이 바로 신라의 멸망으로 가는 시작점이었던 것입니다 ㅡㅡ;

제51대 진성여왕은 임금이 된 지 몇 해 만에, 유모 부호 부인과 그의 남편 위홍 등 서너 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정사를 어지럽히니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삼국유사』, 진성여왕 거타지 ( )


로마제국 등 모든 역사상의 대제국들이 그러하였듯이.. 통일신라 또한 너무 긴 평화와 소수에 의한 부와 권력의 독점이 지배층의 나태를 부르고, 소외된 하층민의 반란들 틈바구니 속에서 결국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역사의 전철을 밟게 되었군요

이것이, 제국을 멸망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는 우발적 사건들은 각기 다를지라도, 로마나 당나라 등 인류사에 출현한 어떠한 대제국들도 결코 피하지 못했던, 인류 역사의 철칙인 듯 합니다 - 물론, 이 또한 우리 인류의 지성과 문명이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밟고 올라서야만 했던 인류 역사상의 고된 한 계단이었습니다!

龍과 지렁이, 미꾸라지 이야기
전설 속의 생물인 dragon 은 단지 우리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민족의 역사에 등장하는, 매우 불가사의한 '존재'입니다(저는 단지 상상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인류의 원시시대 때.. 당시까지 잔존했던 마지막 공룡이었던, 날아다니는 거대한 익룡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담아서 수만년에 걸쳐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한편, 같은 龍자 항렬인 地龍지룡(지렁이) 는 진흙을 파고 들어가서 물을 흐려놓곤 하는데, 그 더럽힌 물 속에서도 홀로 잘 살아가는 넘입니다. 또한, 암수 한몸으로서 몸 안에 암수의 생식기가 모두 존재합니다. 또 다른 龍자 항렬인 龍주래기(* 미꾸라지의 사투리임)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린다’(한넘이 동네 전체 이미지를 추락시킨다), ‘미꾸리처럼 (법망을)잘도 빠져나간다’는 속담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사회 풍자의 주된 단골 메뉴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참고로, 같은 龍자 항렬 친척 중에는 고위봉 아래 사는 螭龍이룡(이무기) 도 있습니다 ^^
➥ 窮민이 계몽될 시간(?)

이쯤이면.. '사과는 개나 주고', 정치합네 하면서 龍山宮 용산 궁궐 에 틀어박혀 무속과 술에 쩔어 지내던 우리 주변의 누군가가 생각나지 않나요?

여기서 불현듯, 龍山 궁궐에 처박혀 맨날 밤 주야장천(= '주구장창')으로 술만 처묵으면서 편하게 놀아대기 위해 멀쩡한 집 주변에 '龍'자 부적 여기 저기 붙여놓은(머, 지넘이 붙였겠지요?) 山으로 옮기고, '반국가세력(?) 척결'을 명분삼아 '구마누라처의 결단'으로 지 여편네의 매관매직(우리는 조선시대 후기의 역사를 배우면서 조선을 망하게 한 '매관매직'이란 단어를 처음 접했습니다만, 이번에 개명천지 대한민국에서 다시 한번 이 단어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ㅡㅡ;) 부정부패를 덮으려 황당 '궁민 계꿈몽령'을 들고나섰던 어떤 덮을 몽키호테 '王'(오직 VIP 1번 자신과 자신의 상전인 VIP 0번 뇬만이 나라의 王이고 龍이고자 했던 넘이기에, 그 뜻이 애틋하여 억지로 붙여준겁니다 ^^) 넘이 떠오르는군요 ㅡㅡ;

法꾸라지 한마리가 어쩌다 龍이 사는 山에 오르더니 건희네 宮 안에서 질탕 놀아대며 온 나라를 망가뜨려 놓고는 건희와 함께 암수 한몸 '권력공동체' 지렁이로 화하여 끌려 내려오다 - Kjc, ⌜소소한 소감⌟


우리 신라의 역사 속에 깃들어 있는 호나라국용을 호마누라처용으로 둔갑시킨 저넘더러 좀 배우라고, 여기서 잠시 진짜 護國龍으로 승화한 문무대왕의 염원이 서려있는 [감은사지]로 들러봅니다

감은사지
감은사지
감은사지
감은사지
감은사지

신라의 고승 이야기

신라에는 참으로 많은 고승들이 기이한 행적과 함께 호국 불교를 설파해 왔는데.. 여기서도 용이 나타나지만, 좀 나쁜 용들 이야기입니다 ㅡㅡ;

신라의 고승 이야기
먼저, 신라 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밀본법사(密本法師)의 행적부터 들어보기로 합니다

선덕왕이 병에 걸린 지 오래되었는데, 흥륜사의 중 법척(法惕)이 조칙에 응하여 병시중을 들어 오래 되었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때에 밀본법사가 덕행으로 나라에 명성이 높아서 좌우에서 그를 대신할 것을 청하니 왕이 조서를 내려 궁궐 안으로 맞아 들였다. 밀본은 신장 밖에서 ≪약사경(藥師經)≫을 읽었다. 권축(卷軸)이 한번 돌자, 가지고 있던 육환장(六環杖)이 침전 안으로 날아 들어가서 한 마리 늙은 여우와 법척을 찔러 뜰 아래로 거꾸로 내던졌다. 왕의 병이 이에 나았는데, 이때 밀본의 정수리 위에 오색의 신광(神光)이 발하니 보는 사람이 다 놀랐다

-『삼국유사』, 밀본최사(密本摧邪) (* 내용 편집) ( )

승상(承相) 김양도가 어린 아이일 때 갑자기 입이 붙고 몸이 굳어져서 말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다. 매양 한 큰 귀신이 작은 귀신을 이끌고 와서 집안의 모든 음식을 다 맛보는 것을 보았다. 무당이 와서 제사를 지내면 곧 무리가 모여서 다투어 희롱하였다. 양도가 비록 물러가라 명령하고자 하여도 입이 말을 할 수 없었다. 부친이 법류사의 중에게 와서 경전을 전독하게 청하니 큰 귀신이 작은 귀신에게 명하여서 철퇴로 중의 머리를 쳐서 땅에 거꾸러져 피를 토하고 죽었다

며칠 후에 사자를 보내 밀본을 맞아오게 하니 사자가 돌아와 말하기를 “밀본법사가 제 청을 받아들여 장차 올 것입니다”라고 하니 귀신들이 그것을 듣고 모두 얼굴빛이 변하였다. 작은 귀신이 말하기를 “법사가 오면 장차 이롭지 못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자 큰 귀신이 거만을 부리면서 “어찌 해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조금 후에 사방의 대력신(大力神)이 모두 쇠 갑옷과 긴 창을 지니고 와서 귀신들을 잡아 묶어 갔다. 다음으로 무수한 천신(天神)이 둘러싸고 기다렸고, 잠시 후 밀본이 와서 경전을 펴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그 병이 이제 완치되어 말이 통하고 몸이 풀려서 사건을 온전히 설명하였다

-『삼국유사』, 밀본최사(密本摧邪) (* 내용 편집) ( )

"머, 니만 있냐? 나도 있다" 하며 나타나는 분이 또 계시는군요 ^^ 바로, 神遊林 신유림(신선들이 머무는 곳 - 현재 낭산 일원)을 세우신 명랑법사(明郞法師)이십니다

밀본법사(密本法師)의 뒤에 고승 명랑(明郞)이 있었다. 용궁에 들어가 신인(神人)을 얻어 신유림(神遊林)을 처음 세우고 여러 차례 이웃나라의 침입을 물리쳤다. 이제 화상은 무외삼장(無畏三藏)의 골자(骨子)를 전하고 속세를 두루 다니면서 사람을 구제하고 만물을 감화시켰다. 아울러 숙명(宿明)의 밝은 지혜로 절을 세워 원망을 풀어주었고, 밀교(密敎)의 교풍이 이에 크게 떨쳤다

-『삼국유사』, 혜통항룡(惠通降龍) (* 내용 편집) ( )

여기서 끝날 수는 없겠지요? 권력家나 부자家나 모두 3대는 걸쳐 내려가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고 하는데(돈 없는 집안의 아이들은 제대로 교육 받기도 힘들고, 나중에도 뭔가를 시작해볼 자금도 모자라니.. 부도 권력도 세습이 되면서 축적되어 간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입니다 ^^), 여기서 멈출 수는 없겠지요? 『삼국유사』에는 남간사 마을에 살던 이 깨우치고 출가한 동기를 알려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남간사] 동쪽 마을에 살던 혜통은 출가하기 전, 어느 날 동쪽 시내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서 죽이고 뼈를 동산 안에 버렸다. 이튿날 아침 그 뼈가 사라졌는데 핏자국을 따라서 찾아가니 뼈는 원래 살던 굴로 돌아가서 새끼 다섯을 품고 웅크리고 있었다. 혜통이 그것을 바라보고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기를 오래 하였다. 감탄하고 망설이다가 문득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여 이름을 혜통으로 바꾸었다

-『삼국유사』, 혜통항룡(惠通降龍) (* 내용 편집) ( )

이 혜통은 당나라로 유학하여 삼장법사의 가르침을 받고, 흰 콩과 검은 콩만으로 당나라 공주의 몸에 깃들어 있던 교룡(蛟龍)을 쫓아냈다고 하는데.. 귀국한 뒤에도 당시 달아나서 신라로 들어와 있던 용과 다시 싸워 내쫓고 또 깨우쳐주기도 하는 등 많은 기이한 일들을 행하면서 불교(密敎)를 전파한 고승이라고 합니다

용은 혜통이 자기를 쫓아낸 것을 원망하여 본국의 문잉림(文仍林)에 와서 인명을 더욱 해쳤다. 이때에 정공(鄭恭)이 당에 사신으로 갔는데 혜통을 보고 일러 말하기를 “법사가 쫓은 독룡(毒龍)이 본국으로 돌아와 해가 심하니 빨리 가서 그것을 없애 주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정공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와 그것을 쫓아버렸다. 용은 또 정공을 원망하여 이에 버드나무로 변하여 정공 집의 문 밖에 나 있었다. 정공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무성한 것을 기려서 매우 사랑하였다

.. [* 주) 이후, 정공은 길을 막고 있던 버드나무를 베어 길을 내려는 효소왕에게 저항하다 죽임을 당함]

용은 이미 정공에게 원수를 갚고 기장산에 가서 웅신(熊神)이 되었는데 해독을 끼치는 것이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했다. 혜통은 산 속에 가서 용을 깨우쳐 불살계(不殺戒)를 주었고, 웅신의 해가 이에 그쳤다

-『삼국유사』, 혜통항룡(惠通降龍) (* 내용 편집) ( )


참으로 기괴하고 기묘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 말 나온 김에, 세계 불교사상 최고 고승 중 한명으로 꼽히는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와 함께 모험을 떠났던) 대당서역기 도 한번 감상해보십시오

비록 손오공 같은 기괴한 능력을 지닌 제자들과 함께 다니지 않아 덜 유명하긴 하지만.. 세계 4대 여행기 중 하나로 꼽히는, 신라의 승려 의 서역 순례기인 왕오천축국전 도 있습니다([프랑스국립박물관] 소장)

골굴암과 기림사

불국사에 있을 때 자전거(전기 자전거 ㅎ) 타고 토함산 석굴암에 올라 감포 쪽으로 내려가서 의 (문무대왕의 염원이 서린) 를 거쳐 까지 내려가 본 적이 있는데, 다들 꽤 재미있는 곳입니다

골굴암 탐험
불국사에 있을 때 보니, 제 친구 상거리(불국사에서 떡집 하고 있는데, 날로 번창하고 있다고 합니다)는 저와는 달리, 수시로 일반 자전거로 토함산 오르더군요 ㅡㅡ; 언젠가 이 넘 왈~ “야, 우리 담에 자전거로 전국 라이딩 함 하자” 머,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이어지는 황당 개무시: “나는 일반 자전거로 가고, 니는 전기 자전거로 가고” (나 참, ㅡㅡ;)
[감은사지]에서 감포 바닷가 방면으로 향하여 해변을 따라가면; [문무대왕릉]을 지나 해변가로 꽤 길게, 멋지게 펼쳐진 주상절리를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만.. 일단, 여기서는 [골굴암] 방면으로 가보기로 합니다. [골굴암]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다리가 후들~ 후들~ 떨리고 겁도 좀 납니다, 각오하세요 ^^
여기서는 똑바로 서서 사진을 찍어도 아슬~ 아슬~ 비틀, 비틀하게 나옵니다 ^^ 남산 [천동골]의 천동탑을 이 거대한 석회암 바위산 전체에다 새긴 듯한 느낌이 드는군요. 거기서는 구멍 하나 하나에 부처님을 새기지 못했지만(구멍 하나 하나가 부처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만), 여기서는 구멍 구멍마다 부처님을 모시려 한 것이 아닌가 싶군요
여기도 역시 딴 곳들과 마찬가지로, 멋진 께서 아래 민초들의 삶을 인자한 미소와 함께 고고히 굽어보고 계십니다. 또한, 이곳에서는 신라의 호국 불교인 밀교의 호국 무술이자 신라의 호국 청년 무사들인 이 단련하던 무술이었다는 공연도 (하루 한번만)볼 수 있습니다. 이참에 석가모니 부처님과 신라의 화랑들이 연마하던 운동도 한번 따라서 (구경만?)해보십시오 - 발레보다도 더 우아하고, 태권도보다는 더 부드러운 감이 드는군요: 선무도 시연 1 선무도 시연 2

골굴암 오르기

골굴암
골굴암
골굴암
골굴암
골굴암
골굴암
골굴암
골굴암
골굴암
골굴암
골굴암
골굴암
➥ 소소한 잡담

다 좋은데.. 부처님 오신 날 기린다고 에워싼 오색 풍선들이 난무하면서 멋진 '작품'을 버린 듯. 무슨 작품을 버렸나요? 스님들이 조성한 골굴암 혹은 내가 찍은 사진;

여기서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프로그래밍 코딩 문법 중 하나를 배웠습니다: 조건? 실행1 : 실행2; 조건 이 참이면; [실행1]을 수행하고, 거짓이면; [실행2]를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어렵나요? 곧바로 답변이 달렸군요 ^^

이상문: 어렵다!

상무이가 어렵다고 엄살부려서; 쉽게 풀이해봅니다: 풍선들이 내 사진을 버렸나요? 저 사진의 풍선들을 다 터뜨려라 : 내가 올린 사진들을 다 삭제하라;


* 해석) 풍선들이 내 사진을 버렸다면; '저 사진의 풍선들을 다 터뜨리라'는 (앞쪽)명령을 수행하고, 아니라면; '내가 올린 사진들을 다 삭제하라'는 (뒤쪽)명령을 수행하라고 컴퓨터에 지시하는겁니다 ^^ 머, 컴퓨터는 [조건]을 판단해서 어느 한 쪽 손을 들어줄 겁니다만, 혹시라도 [조건]이나 [명령]이 애매하게 작성되어 있어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면; 컴퓨터는 다운되고 맙니다 ㅡㅡ;

구도의 길, 기림사
다리 후들후들 떨리는 [골굴암]까지 올라본 김에 원효가 창건하고 지냈다는 그 옆 [기림사]도 들러보기로 합니다. 불국사를 살~짝 축소해놓은 듯한 모습이지만, 불국사처럼 거대하고 화려하지 않으면서 좀 더 은은하고 조용한 사찰입니다. 여기에는 5곳에서 흘러나오는 五井水오정수 와 천년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라는 한약초, 용이 된 문무대왕과 김유신이 전해준 신문왕의 호국 피리인 이야기들이 전해집니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 대항하는 호국 승병들의 거점이었다고도 합니다

기림사 돌아보기

기림사
기림사
기림사
기림사
기림사
기림사
기림사
기림사
기림사
기림사
기림사
➥ 만파식적 이야기

『삼국유사』('만파식적' 편)에서는 신문왕이 용이 된 문무대왕과 김유신으로부터 얻은 호국 피리인 만파식적 이야기를 장황하게 전하고 있지만.. 김부식은 그 이전에, 『삼국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냉정하게'(?) 평가합니다

고기(古記)에는 “신문왕 때에 동해 가운데에 홀연히 작은 산이 나타났는데, 모습이 거북이 머리와 같았다. 그 위에 한 그루의 대나무가 있어서 낮에는 갈라져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합해져 하나가 되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베어다가 적(笛)을 만들고 이름하여 만파식(萬波息)이라 하였다” 라고 하였다. 비록 이러한 이야기가 있으나 괴이하여 가히 믿을 수 없다

-『삼국사기』 ( )


✓   한번 불면 많은 기이한 능력들을 발휘하기도 하고, 여러번 분실되기도 하고, 이름이 바뀌기도 하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현재 [경주박물관]의 수장고에 비밀스럽게 보관되어 있는 이 바로 그 [만파식적]이라고 합니다, 다행이군요 ^^

눈 내린 불국사

위에서 조선의 천재화가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를 살펴보았지만, 이곳 경주에도 그에 못지않은 현대 미술계의 대가가 계십니다. 바로, 수묵화의 대가 화백입니다

눈내린 불국사
이곳 경주에서는 눈 구경하기 참 힘듭니다만.. 이 글의 주제는 '눈'이 아니라 소산 박대성 화백이 ‘운 좋게’ 그리게 된 [눈내린 불국사 전경](1996년) 이야기입니다. 소산 박대성 화백이 미국에서 돌아온 뒤, 경주 여행 중 불국사를 둘러보고서, 무작정 절 관리소에 쳐들어가서는 내가 그림 그려야 하니 방 하나 내놓으라 겁박해서(조폭 화백?) 절 안에서 지내던 중, 운 좋게 눈이 내린 날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
눈내린 불국사 전경
눈내린 불국사
소산은 현재 남산 삼릉 부근에 살고 있는데, 어리던 5살 해방정국에서의 좌우익간 무장 투쟁 당시 아버지 등에 업혀 피신하다 한 팔을 잃고 지금껏 하나의 팔로 그림을 그려왔답니다. 팔 하나로 그림을 그려야 하기에 여러가지 색의 물감들을 짜내기 힘들어 흑백으로 그린 거 아닌가 싶군요 ㅡㅡ; 옆 사진은 얼마 전 두 분이 산책하고 계시길래(부인도 역시 화가십니다), 쫓아가서 한판 부탁드려 찍은 잉꼬 부부의 화기애애한 모습입니다 ^^

경주에 오시면; 도 한번 들러서 소산 박대성 선생의 작품을 감상해보십시오.. 한국 수묵화의 거장 , 한국 서화의 정신


눈내린 불국사공원: 워낙 눈이 안오는 경주라서, 여기 이사온 이래 눈 쌓인 남산 풍경은 찍어볼 기회가 없었고, 이사오기 전 해인 2019년에 찍었던 눈내린 [불국사공원] 풍경입니다 - 벚꽃이 눈꽃을 시샘할까 해서, 같은 해 [불국사공원]에 핀 벚꽃도 사이좋게 끼워줬습니다만.. 서로 내가 이쁘니, 니가 덜 이쁘니 하면서 싸우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불국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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